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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건.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구원: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초기 역사와 그 신비

베드로의 집유적 (가버나움, 1세기 후반)

Joseph Kwon

Mar 21, 2023

첫번째 사건.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구원: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초기 역사와 그 신비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2천 년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강력한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 당시와 그분이 승천하신 후 사도행전 초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거부하고 저항했지만, 성경 기록에 따르면 동시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2천 년 전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많지 않기에 정확한 통계적 수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역사학자들의 추정은 초기 기독교를 믿던 유대인들이 매우 많았고, 그 수가 계속 증가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학자들은 AD 40년에서 50년대에 예루살렘의 상주인구가 6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같은 기간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의 규모가 2만 명까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Hengel, M. 1989) 이는 상주인구를 중간값인 8만명으로 계산했을때 대략 전체 예루살렘렘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비율입니다.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인구의 25%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에서는 더 많은 비율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음을 추정하게 합니다.


또한, AD 70년 성전 파괴와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 기간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은 유대인 기독교인이었습니다.(Eusebius of Caesarea. c. 325) 또한 바울도 당시 로마제국에 흩여졌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거점으로 전도사역을 했고, 많은 경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전도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복음이 로마인들에게 증거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초기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비율도 매우 높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엄청나게 많은 유대인들이 그 수를 늘려갔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고고학적 유적과 최근 확인되는 증거들을 통해, 곧 전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확신이 충만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고학적 유물 및 문헌으로 확인되는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다음은 초기 유대인 예수 추종자들의 실체를 입증하는 주요 고고학적, 문헌적 증거들입니다. 참고로 고고학적 유물에서 예수님의 히브리어식 표현인 예슈아라는 단어들이 등장한다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 공동체가 많았음을 증명하진 못합니다. 이유는 예슈아라는 이름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등의 이름들은 다 구원자라는 뜻의 예슈아와 같은 뜻에서 유래된 이름들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자라는 의미인 예슈아는 구약전체에서 중요한 개념이었기에 자주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예슈아라는 단어와 함께 주님, 그리스도, 익투스등 초대 그리스도인이 사용했던 연결된 단어들이 같이 나오는 것들을 통해 이스라엘 전역에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집유적 (가버나움, 1세기 후반)은 프란치스코회(SBF)가 발굴을 주도했는데, 가버나움에서 발굴된 집 한 채가 1세기 후반부터 기독교 모임 장소로 전환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4세기 이전부터 베드로의 집으로 전승되었으며, 유대인 마을 내부의 유대집 구조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는 낙서 등이 발견되어 초기 유대인 예수 추종자들의 가정교회 형태를 보여줍니다.(Loffreda, S. 2005)


2.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낙서(Christograms)  갈릴리와 골란 지역 유대교 회당과 가정 유적에서는 ΧΡ (크리스토스 약자), ΙΧΘΥΣ(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인 표식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표식들은 2세기 이전 양피지나 도자 파편(ostraca)에서도 확인되며, 갈릴리 유대 공동체 안에 유대-그리스도인 그룹이 존재했음을 제시합니다.(Fine, S. 2005)


3. 나자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 1세기것으로 추청되며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덤 파괴 금지 칙령(1세기)은 예수의 부활 소문이 유대 땅에서 확산되었을 때 로마가 대응한 것으로 해석되며, 유대 지역에서 예수의 사후 신앙이 매우 초기부터 퍼져 있었다는 간접 증거로 여겨집니다.(Smallwood, E. M.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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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비문>

4.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증거, 요세푸스 및 기타 문헌, 역사가 요세푸스는 Antiquities 에서 야고보, 예수라 하는 이의 형제를 언급하며 예수 신앙 유대인 공동체의 존재를 시사했습니다. 또한,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등장하여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에비온파(Ebionites) / 나사렛파(Nazarenes)와 같은 유대-그리스도인 그룹이 역사적 문헌 다수에 기록되어 그 문헌적 존재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Josephus. 1965)


5. 히브리어 마태복음 전승, 에우세비우스와 파피아스가 마태복음의 히브리어 원본을 언급한 전승은 히브리인 대상의 예수 신앙 공동체가 상당 규모였음을 시사하며, 유대 땅 내부 교회의 연속성을 입증합니다.


6. 중동 지역 유대-그리스도인의 무덤 발굴 (1–3세기)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의 초기 무덤들 중에는 히브리 이름과 그리스도 신앙 표식이 동시에 등장하는 명문, 예: 요나단, 예수의 종(δοῦλος Ἰησοῦ)과 유사한 사례들이 확인되어 유대인이면서 예수 신앙을 가진 집단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Testa, E. 1972)


7. 제임스 오슈어리(James Ossuary) (1세기) 명문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형제>는 진위 논쟁에도 불구하고 명문 자체의 연대는 대체로 인정되어 초기 유대인 교회 지도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중요한 유물로 간주됩니다.(Routledge, B.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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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어로 적힌 내용: "Ya'akov bar Yosef akhui di Yeshua" ("James, son of Joseph, brother of Jesus")>

8. 예수 신앙을 가진 유대인 순교자 기록 문헌, 사도행전의 스데반 순교 (행 7장)와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행 8장) 기록은 고고학적 유물은 아니지만,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역사 문헌 증거입니다. 특히, 갈릴리 호수 근교 회당에서 예슈아(Yeshu/ Yeshua)라는 이름이 초기 기독교적 기호와 함께 발견된 사례는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뒷받침합니다.


9. 마그달라(Magdala) 회당 인근 발견 예슈아 명문 (1세기 후반–2세기): 마그달라 1세기 회당 주변 가옥에서 “ישוע(Yeshua)”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낙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초기 기독교적 명칭·기호(특히 fish/ICHTHYS 형태의 상징)와 같은 층위(Stratum)에서 나와 주목받았습니다.(Aviam, 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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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회당의 모습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마그달라 회당터>

10. 가버나움(Capernaum) 지역 1–3세기 유물 중 예슈아 표기, 예수의 사역 중심지인 가버나움 1–3세기 도자기 파편(Ostraca) 상당수에 예슈아(Yeshua) 이름이 새겨진 개인 표시가 발견되었으며, 이 파편 중 일부가 조기 기독교를 상징하는 기호(ΧΡ, 물고기)와 같은 층위에서 발견되어 유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Tzaferis, V. 1989)


11. 골란(Golan) 지역 회당 유물, 골란 고원 남부의 회당 유적 중 아람어 비문에 예슈아(ישוע)라는 이름과 구원(ישועה) 관련 단어가 반복되어 등장한 사례는 일반적 이름 또는 유대-그리스도인 집단의 의도적 중첩 사용으로 해석됩니다.


유대인에게 메시아 신앙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추정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든 민족으로 가라는 분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초기에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집중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기 어렵다고 오해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구약 배경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면, 상식적으로 구약 배경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 수없이 많은 예언들과 이스라엘 사회의 메시아에 대한 속담, 문화, 절기들이 예수님이라는 퍼즐 조각을 넣었을 때 모두 완벽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풀지 못하던 고대 수수께끼가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전히 설명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다니엘 9장의 메시아 도래 시기와 연결된 기대와 함께, 로마 황제의 신성 모독적 행위 등으로 인해 메시아적 분위기가 만연했을 것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기대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다윗 왕국의 재건에 집중되었지만, 예수님의 메시지와 제자들의 목숨을 건 증거는 오랫동안 유대인의 생각을 붙잡았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반란과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분리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미스터리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AD 70년부터 시작된 유대 민족의 반란은 바로 메시아적 기대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이라는 두 가지 비전 가운데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전체 인구의 유대인 비율은 정확한 통계가 남아 있지 않지만, 대략 로마 제국 인구의 7~12% (학계 추정 약 8~10%)를 차지했으며, 약 400만~7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 90% 이상이 디아스포라에 살았지만, 강력한 종교적 비전과 독립운동 열망, 그리고 강한 네트워크를 가진 유대민족은 로마에게 신경 쓰이는 존재였습니다.(Schäfer, P. 2003)


AD 40년 칼리굴라 황제는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시라아 총독에게 자신의 신상을 만들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이는 십계명의 첫번째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두번째 우상을 세우지 말라는 명령에 반대되는 신성모독적 사건이자 다니엘서에 예언된 멸망의 가증한 것을 연상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대 혼란을 겪으며 유대인들가운데 메시아가 나타나 이 모든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기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Josephus. 1965)


그리고 AD 66년, 로마가 최악의 황제 네로(AD 54-68년)와 1년에 황제 4명이 바뀐 대혼란기(AD 69년)를 겪는 시기에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유대 공동체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가득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이후 황제)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고, 유대인의 반란(AD 70년 베트니 반란, AD 132-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 등)은 지속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예수님을 믿던 유대인들과 믿지 않던 유대인들 간의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인을 이단(heretic)으로 규정하게 된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감정이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정체성과 충돌하는 신학적, 역사적 배경이었습니다. 유대교는 메시아를 정치적 해방과 율법 확립을 가져올 지도자로 기대했고, 하나님을 사람으로 보는 인식은 신성모독으로 여겼으며, 성전과 제사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은 유대교 종교 자체의 붕괴로 느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 AD 90년경 야브네에서 랍비들이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배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단자들을 저주하는 기도(Birkat Ha-Minim)를 매일 기도문에 넣으며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인 증오와 질시를 심었습니다.(Schiffman, L. H. 1998). 놀랍게도 이 기도문은 지금도 유대교 회당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유대인의 마지막 로마 반란인 바르 코크바 반란(AD 132-135) 때, 가장 유명한 랍비 아키바가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인정했으나, 예수님을 믿던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 민족주의 진영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민족의 배신자로 간주했고, 이 시기부터 랍비 문헌에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이 명확하게 외부자, 이단으로 정의되었습니다.(Cohen, S. J. D. 1987)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유대교안에서 소외되며 배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결과와 신비의 성취

이 역사적 과정을 보면 신비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과가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도, 믿지 않던 유대인들도, 로마인들도 각자의 입장에서 정의를 행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점점 끊어지고 약화되는 결과가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