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seph Kwon
Feb 21, 2026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슬람 수용과 종교·정치 질서의 전개 —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1. 예루살렘의 역사에서 이슬람은 언제, 어떻게 유입되었는가? 이슬람 이전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기독교는 왜 몰락했는가?
이슬람이 등장하기 이전인 7세기 초 예루살렘은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기독교가 도시의 지배적인 종교이자 문화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 예루살렘의 주요 교회들은 제도화된 성지로 관리되었고, 기독교 제국인 비잔틴 제국의 후원과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장소에 대한 과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예루살렘이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신화와 전승은 성지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인간의 근원적인 천국에 대한 갈망과 결합되면서 예루살렘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과 같은 장소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예루살렘 인식에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했다. 도시 외부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과도한 이상화와 신비화가 형성되었고, 실제 거주민들은 성지를 지켜야 할 신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러한 인식 구조는 이후 역사 전반에 걸쳐 반복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의 중요한 정신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비잔틴 제국 통치하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심각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의 도시 거주와 성지 접근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특히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인 서쪽 벽은 의도적으로 폐허와 쓰레기장으로 방치되었다. 비잔틴 기독교인들은 이를 유대교의 몰락과 신적 심판을 상징하는 표지로 해석했다.
610년,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비잔틴 제국을 침공하면서 약 20년에 걸친 대규모 전쟁이 시작되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교회가 파괴되었다. 당시 유대인 공동체는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페르시아를 지원했다. 이후 629년 비잔틴 제국은 예루살렘을 탈환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두 제국 모두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었다. 예루살렘은 황폐화되었고, 비잔틴 제국은 군사적·경제적으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이집트인 등 다양한 민족과 여러 기독교 종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정교를 중심으로 통치를 유지했지만, 기독교 세계는 이미 심각한 교리 논쟁과 종파 분열에 빠져 있었다. 예루살렘의 각 종파는 도시를 하나의 공동 신앙 공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파적 구역을 유지해야 할 공간으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종파 간 갈등은 이슬람과의 종교적 대립보다도 주민들의 일상에서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랍 무슬림 군대가 예루살렘에 접근했을 때,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정교를 제외한 다수의 기독교 종파와 유대인 공동체는 오히려 새로운 통치 세력의 등장을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에게 비잔틴 제국과 초기 이슬람 세력은 신앙의 수호자라기보다 행정적 통치자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이슬람 통치 아래에서의 세금 부담은 비잔틴 시대보다 훨씬 낮았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주권보다 자신들의 종파와 거주 구역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현실주의적 태도는 이후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역사가들은 633년 시리아에 대한 첫 아랍 침공부터 640년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완전한 정복에 이르기까지 약 7년 동안 예루살렘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고 평가한다. 초기 칼리프 정부는 종교적 개종보다는 세금 징수, 군사 작전 유지, 행정 체계 확립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었다. 이 시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통치한 무슬림 지도자들 역시 상인이나 유목민 출신이 많았으며, 실용적인 행정 운영에 집중했다.
예루살렘의 정복은 638년에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이미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투 이후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잇달아 함락되었고, 예루살렘은 고립된 상태에서 장기간 포위를 견디다 항복했다. 당시 도시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는 항복 조건으로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카타 브에게 직접 도시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고, 우마르는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우마르는 도시 인도 이후 이른바 ‘알-우마르 조약’을 체결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종교적 권리를 보장했다. 교회와 성소는 보호되었고, 종교 의식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비무슬림 주민들은 군 복무 의무 대신 지즈야와 토지세를 납부하는 딤미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또한 비잔틴 시대에 금지되었던 유대인의 예루살렘 정착 역시 다시 허용되었다. 우마르는 이후 성전산으로 향해 쓰레기장으로 방치되어 있던 이 지역을 정화하고, 남쪽 벽 인근에 모스크 건설을 명령했다. 이 건축물은 훗날 알-아크사 모스크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유대교의 패배를 상징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지로 재정의하고 복원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마지막으로 우마르는 예루살렘을 예언자들의 도시로 인정하면서도, 그 계시는 무함마드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기독교 내부 상황과 유대교와의 긴장을 넘어, 최종 계시 종교로서 이슬람의 우월성과 완결성을 예루살렘 통치를 통해 확증하고자 했다.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이슬람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이슬람 세력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대한 절대적 반대와 이슬람 성지 수호를 핵심 입장으로 삼았다. 이슬람 세계는 팔레스타인을 단순한 영토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이슬람 움마 공동체의 신성한 유산으로 인식하며 타협 없는 저항을 이어갔다.
1947년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예루살렘의 최고 종교 지도자였던 아민 알-후세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지도층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이들은 이슬람의 땅은 결코 양도될 수 없으며, 서구 열강이 유대 국가를 강제로 수립하는 것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대한 침략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주변 아랍 국가들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했고, 이러한 투쟁을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지하드로 규정했다.
이슬람에서 예루살렘(알-쿠드스)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 성지로 여겨지며, 알-아크사 모스크가 위치한 곳이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예루살렘이 동서로 분단되자,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은 동예루살렘과 성전산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유대인의 성지 접근을 차단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아랍-이슬람 정체성을 지닌 도시로 유지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인식했으며, 스스로를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로 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는 지역 분쟁을 넘어 전 세계 무슬림의 단결을 촉발하는 상징적 사안이 되었다. 이집트 등지에서 유입된 무슬림 형제단 소속 자원봉사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구하는 것이 곧 이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주변 아랍 국가의 지도자들 역시 자국 내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적 명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특히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은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이슬람 세력에게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를,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패배의 처절함 속에서 종교적 각성이 풀뿌리 저항으로 급격히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대중은 이집트의 나세르와 같은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랍 연합군이 단기간에 참패하자, 패배의 원인을 세속 정치가 아닌 신앙의 약화에서 찾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대안적 사상으로 부상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 시작된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이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빠르게 확장되었고, 이후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 이후, 이슬람 세계는 이를 성지에 대한 중대한 위기로 규정했다. 알-아크사 모스크는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 이 되었으며, 이슬람 공동체 전체에 역사적 부담이자 집단적 불명예로 인식되었다. 과거의 저항이 영토 회복을 위한 민족주의적 투쟁이었다면, 1967년 이후에는 점차 전 이슬람 세계의 성전, 즉 지하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1980년대 후반 등장한 하마스는 1967년의 패배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며, 협상이 아닌 무력을 통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최종 목표로 설정했다.
3. 팔레스타인 무슬림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슬람 학파는 무엇이며, 중심 인물과 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의 무슬림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4대 법학파 중 샤피이 학파를 주로 따른다. 이 학파는 꾸란과 하디스를 엄격히 준수하면서도, 명확한 근거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상황에 맞는 합리적 해석을 허용하는 중용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예배, 결혼, 상속 등 일상적인 종교 생활 전반에서 샤피이 학파의 해석이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왔다.
현대 정치와 저항 운동의 측면에서는 이슬람주의(Islamism) 사상이 강력한 지배력을 갖고 있다. 현대 팔레스타인 무슬림 사회에서 저항 운동의 상징적 인물은 하마스의 창설자인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Sheikh Ahmed Yassin)이다.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한 전신마비에도 불구하고, 강한 카리스마와 종교적 헌신을 바탕으로 가자지구에서 이슬람 복지 활동과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
야신과 하마스의 사상적 기초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사상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땅은 개인이나 특정 민족의 소유물이 아니라, 알라가 무슬림 공동체를 위해 지정한 종교적으로 양도 불가능한 재산이다. 따라서 이 땅의 어떠한 부분도 이교도로 간주되는 이스라엘에게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다는 논리가 형성된다.
또한 이들은 이슬람을 단순한 종교적 의례 체계가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완전한 삶의 체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모든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 즉 지하드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상은 무슬림 형제단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이드 쿠틉의 사상과도 이론적 기반을 공유한다. 아흐메드 야신은 이러한 종교적 담론을 통해 세속적 성격이 강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차별화되는 강력한 이슬람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4. 이슬람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국가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이슬람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슬람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단순한 종교를 넘어 민족 정체성, 저항의 명분, 그리고 국제적 연대의 기반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동력으로 기능해 왔다.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이슬람은 법과 교육, 정치 영역을 관통하는 중심 기둥이며, 특히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 노선을 취하는 하마스와 같은 세력은 이슬람 교리를 근거로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영토는 와크프(Waqf), 즉 신이 맡긴 거룩한 땅으로 인식되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또한 국가 권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이슬람 자선 단체들은 병원 운영, 교육 제공, 구호 활동을 주도하며 민중의 일상 속으로 깊이 침투했다. 이는 종교적 헌신이 정치적 지지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외부의 점령과 억압 속에서도 무슬림으로서의 자부심과 전통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와 함께 예루살렘, 즉 알-쿠드스는 이슬람 세계 전체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동원력의 원천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알-아크사 모스크가 위치한 이곳을 수호하는 것은 전 세계 약 18억 무슬림에게 신앙적 의무로 인식된다. 더불어 이슬람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은 무함마드 시대 이후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다가 십자군에 의해 상실되었고, 이후 살라딘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다는 역사적 서사를 지닌다. 이러한 기억은 오늘날의 예루살렘 상황을 십자군 시대와 중첩시키며, 이슬람에 의한 예루살렘 회복을 강력한 역사적 사명으로 재구성한다.
그 결과 예루살렘의 지위 변화나 성지 접근 제한과 같은 사안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민중 봉기뿐 아니라 전 세계 이슬람 국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촉발하는 민감한 사안이 된다.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문제는 전 세계 이슬람 움마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종교적·역사적 과제 중 하나로 인식된다. 이러한 이유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갈등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과 예루살렘 수호라는 명분 앞에서는 이슬람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공동의 목소리를 내어 왔고, 이는 이슬람협력기구(OIC)가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슬람 세계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각국 지도자의 종교적 정당성과 정치적 진정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과거 중동전쟁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지역 강대국들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아 영향력 확대를 시도해 왔다. 현재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터키 등 주요 이슬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중동과 이슬람 세계 전반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디노풀로스, 토마스 A. (2002). 예루살렘. 이동진 옮김. 서울: 도서출판 그린비. (원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