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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지역–라호르

Stephen Jang

Mar 10, 2026

인도·파키스탄 지역의 이슬람 수용과 종교·정치 체제의 전개 — 라호르를 중심으로

1. 파키스탄의 역사에서 이슬람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가?

파키스탄 지역에 이슬람이 처음 전래된 것은 8세기 초(AD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무함마드 빈 카심(Muhammad bin Qasim)이 현재 파키스탄의 남부 신드(Sindh) 지역을 정복하면서다(Eaton, 1993). 그러나 그 시점의 이슬람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의 산물이었고, 토착 사회의 종교적 성격을 바꾸는 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슬람의 실질적인 확산은 이후 몇 세기에 걸쳐 활동한 수피(Sufi) 성인들과 전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Ernst, 1992).

그들은 인도 대륙의 다양한 종교 전통 속에서 영적인 조화를 강조했고, 강압적인 정복 대신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신드의 랄 샤바즈 깔란다르(Lal Shahbaz Qalandar)[1]나 펀잡의 다타 간즈 박쉬(Data Ganj Bakhsh)[2]와 같은 인물들은 이슬람을 토착 문화와 접목시켜 남아시아 특유의 신비주의적 신앙 형태를 만들어냈다(Ernst, 1992). 이러한 전도 방식은 아랍 지역처럼 교리 중심적, 율법 중심적인 이슬람과는 다른 색채를 형성했다.

무굴 제국 시기(1526–1857)에는 이슬람이 문화, 학문, 정치의 중심적 요소로 자리 잡았고(Robinson, 2007),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문학이 꽃피면서 종교적 정체성과 예술적 표현이 공존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슬람은 당시 사회의 통합 원리이자 행정 질서 근간의 기능을 했다. 무굴왕국 제3대 황제 아크바르(Akbar the Great)가 시도했던 종교적 관용 정책[3]은 남아시아 이슬람의 개방성과 융화적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결국 파키스탄 지역의 이슬람은 단번의 정복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사회적, 문화적 토양 속에 스며든 결과물이다(Eaton, 1993).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파키스탄이 중동의 정통 아랍 이슬람 국가들과 달리, 신비주의와 다원주의가 공존하는 “남아시아적 이슬람 문명권”으로 자리 잡게 한 근본적 배경이 되었다.


2. 이슬람이 유입될 때 이에 저항하는 종교나 힘이 있었는가? 이슬람 전에 기독교가 있었다면 기독교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이 파키스탄 지역으로 확산될 당시, 기존의 주요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였다. 특히 신드와 펀잡 지역에서는 브라만 중심의 힌두교 사회구조가 확고했으며, 불교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Eaton, 1993). 이슬람의 확산 초기에 정치적, 군사적 저항이 존재하긴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종교적 경쟁보다 사회적 흡수가 주요한 특징이었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했는데, 이슬람의 “모든 신자 앞의 평등”이라는 사상은 사회 하층민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불교의 평화와 내면의 해탈 개념은 수피즘의 영성적 메시지와 유사하여, 자연스러운 융합이 이루어졌다(Ernst, 1992). 이런 점에서 이슬람의 전래는 외래 종교의 강압이 아니라, 기존 종교의 구조적 한계와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대중적 반응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 시기(19세기)에는 종교가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통해 힌두교와 이슬람 사이의 균열을 의도적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 공동체를 넘어 민족 정체성과 정치 저항의 상징으로 발전했다. 특히 알리가르 운동(Aligarh Movement)[4]과 무슬림 리그(Muslim League)[5]의 등장은 이슬람을 근대적 교육과 정치적 자각의 틀로 재해석한 사건이었다(Jalal, 1985). 이는 힌두 중심주의와 서구 세속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형성된 흐름이었다. 결국 파키스탄의 이슬람은 억압된 계층의 해방 이념이자, 민족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작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파키스탄의 이슬람화는 중동의 정복적 이슬람화와는 다른, 사회적 해방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


3. 세계대전 이후 이슬람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세계대전 이후, 인도 아대륙의 분할 독립과 함께 파키스탄은 1947년 “이슬람 국가”로 탄생했다. 그러나 건국의 주역 무함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는 종교적 근본주의보다는 세속적 정치체제를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슬람 원리에 기반한 세속 민주주의”를 꿈꾸었으나, 독립 이후 사회적 혼란과 인도와의 전쟁, 그리고 내부 정치 불안 속에서 점차 종교적 정체성이 강화되었다(Zaman, 2018).

1950~60년대에는 군사정권 하에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사회 저변의 종교적 요구를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다. 1970년대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정권은 사회주의적 색채 속에서도 “이슬람 사회주의(Islamic Socialism)”를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종교계와 보수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1977년 집권한 지아 울하크(Zia ul-Haq) 장군이 본격적인 ‘이슬람화(Islamization)’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게 되었다(Nasr, 1996).

지아 정권은 마우두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저술을 정책적 기초로 활용했다. 교육, 사법, 금융 제도 전반에 샤리아 원리를 반영했고, 국가 정체성을 “이슬람 질서의 구현”으로 재정의했다. 신성모독법이 이 때 파키스탄 헌법에 추가되었다.

냉전기에 파키스탄은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을 유지하며 동시에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는 정치와 외교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이는 훗날 탈레반 운동의 토양이 되었다. 세계대전 이후 파키스탄의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과 국가 생존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은 “이슬람 세계의 핵심 파트너이자 실험적 모델”로서 독자적 입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4. 파키스탄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슬람 학파는 무엇이며, 중심 인물은 누구인가?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파키스탄의 이슬람 사상은 수니파 내부의 학문적 전통 위에 서 있으며,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친 하나피(Hanafi) 학파의 영향 아래에 있다. 파키스탄의 주요 학파인 데오반디(Deobandi)바렐비(Barelvi) 또한 모두 하나피 율법 체계 위에서 발전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Sanyal, 1996).

그러나 두 학파의 신학적 지향은 크게 다르다. 데오반디 학파는 19세기 인도 북부 데오반드 지역에서 설립된 마드라사를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꾸란과 하디스에 대한 철저한 문자주의적 접근과 율법 중심의 삶을 강조했다. 그들은 종교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서구 식민주의와 세속주의에 맞서는 개혁 운동을 펼쳤다. 반면 바렐비 학파는 수피즘의 영향을 받아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성인 숭배, 예배와 축제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데오반디가 이성적이고 절제된 신앙생활을 강조한다면, 바렐비는 정서적이고 공동체 중심의 신앙 실천을 강조한다. 두 학파 모두 남아시아 이슬람의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그 표현 방식은 전혀 달랐다. 데오반디가 교리적 순수성을 통해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면, 바렐비는 문화적 전통을 통해 신앙의 대중화를 이끌었다(Metcalf, 1982).

이러한 전통 속에서 20세기 중반, 새로운 방향의 이슬람 운동을 제시한 인물이 마우두디(Abul A‘la Maududi, 1903–1979)이다. 그는 파키스탄의 정치적 정체성이 세속주의와 식민적 가치 속에서 흔들리는 것을 비판하며, 이슬람을 단순한 종교가 아닌 정치, 경제, 법, 문화 등 전 영역을 포괄하는 완전한 체계(Complete System)로 규정했다. 그의 핵심 사상은 ‘신의 주권’으로, 인간의 입법권보다 신의 법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원리였다(Maududi, 1960).

1941년 그는 이러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자마아테 이슬라미(Jamaat-e-Islami)를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파키스탄 독립 전에는 인도 무슬림 사회의 도덕적 각성과 이슬람적 사회개혁을 강조했고, 독립 후에는 이슬람 헌법 제정 사회 정의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마우두디는 이슬람이 단지 개인의 구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의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공적 체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Nasr, 1996).

자마아테 이슬라미는 이후 파키스탄 정치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육, 복지, 언론 분야에서도 활동을 확장했다. 그의 사상은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이나 이란 혁명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며 현대 정치 이슬람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결국 파키스탄의 수니파 내부는 율법 중심의 데오반디, 신비주의적 바렐비, 정치 실천 중심의 자마아테 이슬라미라는 세 축이 공존하고 있다. 세 흐름 모두 하나피 전통을 공유하지만, 율법을 강조하느냐, 영성을 강조하느냐, 사회 체계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노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구조는 파키스탄이 단순히 중동의 신학을 모방한 국가가 아니라, 남아시아적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이슬람 사상을 발전시킨 복합적 사회임을 보여준다.


5. 이슬람이 파키스탄에 끼치는 영향력은 무엇이며, 이슬람 세계에서의 역할은 어떠한가?

이슬람은 파키스탄의 정체성, 정치, 문화, 법률, 사회 윤리 전반을 지배하는 핵심 축이다(Zaman, 2018). 헌법 제2조에 “파키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모든 입법은 샤리아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국가의 제도적 정체성을 명확히 하면서도, 동시에 종교 자유와 세속적 법치 간의 긴장을 야기했다.

사회적으로 이슬람은 가족 제도, 교육, 도덕, 복지, 사회 정의의 기본 기준으로 작동한다. 특히 라마단, 금요일 예배, 자카트(의무 헌금) 제도는 공동체적 연대와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종교의 정치적 이용은 빈번하며, 정파 간 갈등이나 소수 종교 탄압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파키스탄은 데오반디, 바렐비, 자마아테 이슬라미 등 다양한 이슬람 세력이 공존하는 복합적 사회를 이루고 있다. 바렐비는 수피 전통에 기반한 관용적 신앙을 강조하고, 데오반디는 율법 중심의 보수 신학을 지향한다. 이러한 학파 간의 차이는 단순한 신학 논쟁을 넘어 사회적 계층, 지역, 정치적 성향과도 맞물린다.

국제적으로 파키스탄은 이슬람 협력기구(OIC)의 핵심 회원국으로서, 중동과 남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한 유일한 이슬람 국가로서, 이슬람 세계에서 군사적 상징성과 외교적 영향력을 동시에 가진다. 파키스탄은 종교적 전통과 근대적 국가 모델이 공존하는 드문 사례로, “정치 이슬람의 실험장”으로 불리기도 한다(Nasr, 1996; Zaman, 2018).

결국 이슬람은 파키스탄에서 단순한 신앙을 넘어,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과 사회 통합의 근간을 형성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파키스탄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도 신학적 다양성과 근대적 제도 실험을 동시에 이어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References)

Eaton, R. M. (1993). The rise of Islam and the Bengal frontier, 1204–176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rnst, C. W. (1992). Eternal garden: Mysticism, history, and politics at a South Asian Sufi center.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Jalal, A. (1985). The sole spokesman: Jinnah, the Muslim League and the demand for Pakist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ududi, A. A. (1960). Islamic law and constitution. Islamic Publications.

Metcalf, B. D. (1982). Islamic revival in British India: Deoband, 1860–1900. Princeton University Press.

Nasr, S. V. R. (1996). Mawdudi and the making of Islamic reviv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Robinson, F. (2007). The Mughal emperors and the Islamic dynasties of India, Iran, and Central Asia. Thames & Hudson.

Zaman, M. Q. (2018). Islam in Pakistan: A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 12세기경 신드(Sindh) 지역에서 활동한 유명한 수피 성인이며, 신비주의와 종교 간 조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그의 무덤(Sehwan Sharif)이 있는 신드주 세흐완(Sehwan)은 지금도 매년 수많은 수피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이슬람 신비주의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2] 본명은 알리 후즈웨이리(Ali Hujwiri)로, 11세기 페르시아 출신 수피 학자이자 시인이다. 그는 라호르(Lahore)에서 활동하며 수피즘의 교리를 전파했고, 그의 저서 Kashf al-Mahjub는 수피 신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무덤(Data Darbar)은 펀잡주 라호르에 있으며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3] 힌두교·이슬람교·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기 위해 비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되던 세금을 폐지하고, 종교 간 대화를 장려했다.

[4] 알리가르 운동(Aligarh Movement)은 19세기 후반 인도의 무슬림들이 서구식 근대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고 정치적 자각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개혁 운동이다. 지도자인 사이드 아흐마드 칸(Syed Ahmad Khan)은 1875년 알리가르에 무함마단 앵글로 오리엔탈 칼리지를 세워, 이슬람 신앙과 근대 학문을 조화시키려 했다.

[5] 무슬림 리그(Muslim League)는 1906년 벵골의 다카(Dhaka)에서 창립된 정치 단체로, 인도 내 무슬림의 권익을 보호하고 정치적 대표권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단체는 이후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의 지도 아래 파키스탄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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