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바도기아 – 튀르키예의 초대교회 유적
- mmihpedit
-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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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준우, 박재현, 금상오, 이지은(소아시아연구회)
갑바도기아는 성경에 두 번 언급된다. 사도행전 2장 9절과 베드로전서 1장 1절이 그것이다. 이 말씀들을 통해 갑바도기아에 초대교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그 흔적으로 많은 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갑바도기아의 유적들은 초대교회와 그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튀르키예 내륙에 위치한 이 지역은 한글 성경에서 ‘갑바도기아’로 표기되며, 현지에서는 Kapadokya (카파도키아)라 부른다. 현지인 관광가이드는 ‘좋은 말들의 땅’이라는 뜻의 고대 페르시아어 katpatuka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지만, Sağdıç(2015)에 따르면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이며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을 뿐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갑바도기아는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80km 떨어진 네브쉐히르(Nevşehir) 일대의 광활한 고원 지대를 말하며, 서기 17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1174년부터는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515년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원래 이 지역은 푸석한 사암지대였는데, 오랜 옛날 에르지에스(Erciyes) 산의 화산 분출로 용암이 덮이면서 지금의 지형이 형성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풍화작용이 일어나 독특한 지형미를 이루었고, 부드러운 암질 덕분에 쉽게 동굴이나 지하 공간을 팔 수 있었다. 이런 지질적 특성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유적이 바로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이다. 이 지하도시는 1963년 우연히 발견이 되었다. 닭이 자꾸 사라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닭의 다리에 끈을 메달아 놓았는데, 그 닭을 찾다가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했고, 그 끝에서 데린쿠유(‘깊은 우물’이라는 뜻)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
깊이 120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이 지하 도시는 현재 지하 8층까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단면도를 보면 개미집처럼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교회, 신학교, 와인 저장고, 동물 우리, 환기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어 약 5천~1만 명이 한 달 이상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독특한 이 지하도시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대 히타이트(기원전 2000년경)나 프리기아(기원전 8~7세기)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설, 둘째,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로마의 박해를 피해 초대교회 성도들이 피난처로 건설했다는 설, 셋째, 이후 무슬림들의 침략을 피해 피신처로 사용했다는 설이다.
특히 두 번째 설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마의 박해가 극심하던 1~4세기에 갑바도기아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으며, 베드로전서는 그곳에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카타콤에 숨었던 것처럼, 갑바도기아의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굴을 팔 수 있는 지질학적 특성을 활용하여 지하에 숨어서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외세의 침입을 피해 이곳이 피난처로 사용되었으며, 8세기 이후 아랍 무슬림들, 셀주크, 몽골, 오스만 제국의 침략 속에서도 지하도시는 계속 확장되었다. 심지어 20세기 초까지도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피신하였으며, 1923년 터키공화국 건국과 함께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이 지역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모두 그리스로 이주해 결국 거주지는 버려지게 되었다. 초대교회부터 20세기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로 사용된 이 지하도시의 교회는, 오늘날 방문객들에게 베드로전서의 시대 상황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소중한 신앙의 현장이다.
수도원 운동의 중심, 괴레메(Göreme)
지하도시 데린쿠유가 ‘박해의 상징’이라면, 지상의 괴레메(Göreme)는 ‘신앙의 부흥’을 상징한다. 기독교 공인 이후인 4~5세기에 형성된 괴레메 수도원 지역은 많은 수도사들이 모여 신학과 신앙을 다듬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이기고 마침내 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다.
‘갑바도기아의 3대 교부’라 불리는 바실리우스(Basil the Great, 330-379),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29-390),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5)는 이 지역 수도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바실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고 최초의 성령론을 저술했으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주재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그 회의에 참석해 삼위일체 신앙을 변호했다. 이처럼 치열한 신학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고뇌하고 기도하며 살았던 곳이 바로 갑바도기아의 수도원들이다.참고로, 개신교가 인정하는 4대 공의회—325년 니케아(이즈닉), 381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431년 에베소(이즈밀 셀축), 451년 칼케돈(이스탄불 카드쿄이)—의 개최지 모두가 현재 튀르키예의 영토 안에 있다. 이 공의회들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곧 오늘날의 정통 교리가 이 땅에서 확립된 것이다.
토칼르 교회의 성화와 전승 괴레메에서 더불어 주목할 만한 것은 10세기경 지어진 비잔틴 동굴교회인 토칼르교회(Tokalı Kilise)의 벽화이다. 아치형의 천장에는 30개의 성화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성경에 직접 나오지 않는 내용도 있다. 인상적인 것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순교 장면이다. 전승에 따르면 헤롯이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사가랴는 성전 안에 아들 세례 요한을 숨기고 그 행방을 밝히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마태복음 23:35에 나오는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를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로 보는 비잔틴 해석 전통이 이를 뒷받침한다.

성상 논쟁의 흔적
여러 동굴교회의 벽화에는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의 흔적도 남아 있다. 8~9세기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 파괴주의자와 성상 옹호주의자 간의 치열한 갈등이 이어졌고, 이는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성상 파괴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의 성화는 단순한 색채와 구도로 메시지를 전했으나,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이 재인정된 이후에는 색감이 풍부하고 정교한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이곳의 벽화들은 단순한 미술사적 변화뿐 아니라, 그 배경에 깔린 신학적 논쟁과 박해의 역사를 함께 증언한다.
갑바도기아의 풍광과 유산
갑바도기아의 지질학적 특성은 지하뿐 아니라 지상에도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파샤바흐(Paşabağ)의 페리바자(Peri Baca, 요정의 굴뚝)와 젤베(Zelve) 계곡에는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며, 괴레메와 으흘라라(Ihlara)계곡 등 곳곳에 동굴교회와 수도원들이 남아 있다. 이 독특한 지형 덕분에 영화 ‘스타워즈’ 촬영지로 추천되기도 했으나, 터키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해 실제 촬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갑바도기아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신앙의 땅이다. 금욕적인 수도원 생활과 진리를 향한 열정이 깃든 이곳은 여전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참고문헌
Sağdıç(2015) Kapadokya ve tarihi bir palavra https://tarihdergi.com/kapadokya-ve-tarihi-bir-palav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