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김송원 연구위원의 글에 대한 응답

  • 작성자 사진: mmihpedit
    mmihpedit
  • 1일 전
  • 8분 분량

이철영(국제정세연구회 연구팀장)



먼저 귀한 글을 써주신 김송원 연구위원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 속에서 선생님의 현지 영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졌고, 암울한 튀니지의 현실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고민과 기도를 하셨을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제가 BAM(비즈니스 선교)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가진 경험과 관점에서 글에 대한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일본에서 경제학 석사를 수료했고, 한동대학교 경영경제학부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경제학의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연구소 내에서는 경제학적 관점을 조금 더 접할 기회가 있었기에, 본 글을 경제학적 시각에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비즈니스 선교의 출발점과 문제의식

 

“왜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소수만 남습니까?”라는 김송원 선생님의 질문은 비즈니스 선교를 시작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이며, 동시에 이 글의 후반부에서 강조된 비즈니스 선교의 필요성으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선교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선교사가 현지인 그리스도인을 직접 돕는 일입니다”라고 하신 부분에서,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감수해야 할 사회적·경제적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두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신 부분도 공감됩니다. 다만 저는, ‘직접적 도움’ 대신 ‘일자리 창출을 통한 간접적 지원’이 과연 이 두 가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동체 내의 긴장과 ‘도덕적 해이’

 

첫 번째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직접 재정지원을 받은 현지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미묘한 긴장감과 비교의식이 형성되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어렵다는 문제는, ‘고용’이라는 형태로 바뀌어도 여전히 동일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선교사를 통해 일자리를 얻게 된 현지인과 이후 교회로 들어오는 제2, 제3의 현지인 사이에도 동일한 긴장감과 비교의식이 존재할 것입니다. 도움의 경로가 ‘현금 지원’에서 ‘고용’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의 모든 현지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비현실적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 출석의 동기가 ‘믿음이 아닌 생계’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교세 확장이나 공동체 유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즉, 신앙적 열심이 아닌 물질적 유인에 의해 행동하는 문제를 초래할 것입니다.

 

“세상 경쟁력을 갖춘 성도”라는 명제의 검토

 

두 번째로 “교회 안에서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지 않고 세상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성경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특히 사도 바울의 사역은 성도들에게 세속적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상의 경쟁력’을 제자양육의 중요한 요소로 본다면, 교회는 신앙훈련보다 입시나 취업, 혹은 경제적 자립을 돕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서 성경에 직접 명시되지 않은 다양한 사역 형태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세상적 경쟁력 강화’가 제자양육의 본질적 부분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 체계와 동일한 경쟁 논리를 받아들일 때, 복음의 본질이 흐려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립의 역사와 성령의 역할

 

교회의 자립에 대해 김송원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에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 역사에서 ‘자립’은 실제로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립의 시작이 경제적 성장보다 ‘성령의 역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1884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후 1900년대 초반까지 한국 교회는 서양 자본에 의존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약 20여 년이 지난 후 “언제까지 서양 자본에 의존할 것인가?”라는 자각이 일어나면서, 자립·자치·자전이 강조되었고, 그 결정적 전환점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었습니다.

Figure 1. The Pyongyang Revival of 1907 Note. The Power of the Gospel to Transform: Lessons from the Korean Church
Figure 1. The Pyongyang Revival of 1907 Note. The Power of the Gospel to Transform: Lessons from the Korean Church

당시 조선의 경제 구조는 농업 중심으로 산업 기반이 거의 없었고, 교회에 온 이들은 대부분 하층민, 여성,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현재의 튀니지와 그리고 여느 선교지를 비교해도 최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이 십시일반 헌금하여 자립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운동성을 갖고 이후 1930년까지 자립교회들이 증가하였고 해방이후에 한국교회는 더 이상 해외 자본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교사들이 일자리를 창출해서 그들을 자립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통해 은혜 받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이것이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닌 운동성을 가지면서 자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자립은 ‘경제적 자본의 투입 및 고용창출’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의 헌신’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저는 성령과 운동성이 자립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사례로, 제가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2025년 기준 이스라엘의 실업률은 2.9%로 OECD 평균(4.8%)보다 낮고, 1인당 국민소득은 약 $54,000로 한국($35,000)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교회들은 여전히 해외 자본에 의존하는 미자립 교회가 많습니다. 이는 고용이나 경제성장이 반드시 교회의 자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반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교회가 진정으로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자리 제공이나 고용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내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변화되지 않은 성도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그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물질적 풍요가 교회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립이 운동성을 갖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립하는 민족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노동시장과 경제적 왜곡 문제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용 창출형 비즈니스 선교 모델을 검토해보겠습니다. 비즈니스의 입장에서 보면, 선교사가 만든 사업이 잘 되고 교회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특히 노동경제학의 틀에서 본다면, 이런 구조가 장기적으로 지역사회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지는 신중히 검토해야 합니다.

노동시장의 임금은 기본적으로 노동력의 수요와 공급, 그리고 노동자의 생산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외부 자본을 도입해, ‘시장 원리’가 아닌 ‘관계성’에 기반한 고용 즉, ‘자신의 교회 교인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경우, 노동시장의 균형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물론 몇 개의 소규모 사업체가 시장 전체를 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갖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모델이 광범위하게 퍼질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시그널링(signaling) 왜곡 문제

노동경제학에서 ‘시그널링’은 노동자가 자신의 숙련도와 역량을 고용주에게 보여주는 신호를 의미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학력, 경력, 자격증 등이 대표적인 신호입니다. 하지만 선교사 중심의 고용 구조가 일반화되면, 이러한 신호가 ‘신앙심’과 ‘충성도’로 대체될 위험이 있습니다. 즉, 노동자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기술이나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선교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취업 기회를 얻으려 하는 신앙 기반 시그널링 구조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신앙의 진정성까지 훼손할 수 있습니다.

 

(2) 근로 유인(incentive) 약화 문제

선교사 중심의 고용 구조에서는 생산성이 낮은 교인을 선교사가 쉽게 해고하기 어렵습니다. 신앙 공동체라는 특수한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로자는 ‘어차피 해고되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서 근로 의욕을 상실하고 태업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과거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자발적 나눔과 헌신이 가능했지만, 성령의 부재 속에서 동일한 집단적 공유 구조를 도입한 공산주의는 결국 근로 의욕 상실과 비효율로 붕괴했습니다. 요컨대, 성령이 없는 경제 구조는 공동체의 생명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 밑에서 태업을 하던 현지인은 외부 시장에 다시 진입하지 못하는 소위 ‘온실 속의 화초’가 될 것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를 만들지 않기 위한 고용형태가 오히려 온실 속의 화초를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과연 사역자와 현지 영혼이 고용자와 피고용자 관계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 우리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3) 시장왜곡의 구조적 결과

이러한 구조는 장기적으로 노동시장의 수요·공급을 왜곡시킵니다. 현지인들은 일반 노동시장보다 교회 내부의 고용을 선호하게 되고, 선교사는 생산성보다 ‘신앙적 관계, 충성도’를 우선시하는 고용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노동시장 전체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외부 시장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선교사 비즈니스가 현지의 경쟁 사업체들을 몰락시키고 노동시장을 왜곡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면, 그것이 과연 ‘성공한 비즈니스 선교’라 할 수 있을까요?

 

정리하자면, 비즈니스 선교의 목적이 ‘현지인 고용’에 맞춰질 경우 경제학적 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인 모델로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구조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 선교는 고용 창출 자체보다 복음적 관계 형성과 사역적 접촉점으로서의 기능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고용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부차적인 측면이며, 비즈니스는 ‘비자 획득’이나 ‘현지 사회 진입’의 통로로 활용될 때 더욱 설득력 있고 지속 가능한 선교 전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즈니스 선교에 대한 정의

 

우선 비즈니스 선교를 논의할 때에는, 무엇보다 용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BAM(Business as Mission)’은 말 그대로 “선교로서의 비즈니스” 를 의미합니다. 저는 BAM Global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표된 2020년 보고서, 2004년 로잔대회에서의 BAM 관련 간행물, 그리고 2014년 교회 개척과 BAM에 관한 보고서 등을 읽은 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BAM의 주체는 선교사가 아니라 ‘전문 기업인’ 이라는 것입니다.

BAM은 단순히 기업을 운영하는 것을 넘어, “기업인이 어떻게 자신의 비즈니스를 통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BAM 관련 사례들을 보면 직장 내 예배, 기독교적 조직문화, 윤리적 경영 등과 같은 주제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선교단체, 선교사들과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를 고민합니다. 또한 BAM은 단지 선교지에서의 비즈니스뿐 아니라, 비(非)선교지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 사명에 참여하는 모든 형태의 비즈니스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의 ‘삼성 스쿨’ 역시 BAM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BFM(Business for Mission)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제 이해로는, BFM은 선교사가 선교를 위해 비즈니스를 ‘도구’ 혹은 ‘수단’으로 활용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BAM은 기업인이 비즈니스를 선교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라면, BFM은 선교사가 비즈니스를 통해 선교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비즈니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후자는 ‘선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추구하는 방향과 성공의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BAM Global은 BAM의 성공 기준을 네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번째는 경제적(Economic) 성공으로 외부 후원 없이 자립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재정 구조를 갖추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선교 사명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기반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Social) 성공으로 일자리 창출, 공정한 임금, 인간의 존엄 회복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시사합니다. 세번 째는 환경적(Environmental) 성공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청지기로서 관리하며,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영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영적(Spiritual) 성공은 복음 전파, 제자훈련, 교회 개척 등을 통해 비즈니스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운영하는 비즈니스의 경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기준(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영적 성공)만으로는 그 성과를 온전히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한 선교사가 비즈니스를 시작했지만 지속적인 적자 상태로 외부 자본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이 비즈니스를 통해 현지인들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교회가 개척되었고, 비즈니스를 지속한다면 더 많은 현지인들이 교회와 연결될 것을 예상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는 명확하게 경제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영적으로는 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례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실제로 사역을 위해서라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즈니스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고, 저도 영혼들이 많이 연결된다면 외부에서 재정을 끌어와서라도 이 사업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즉, 선교사의 비즈니스에서는 경제적 성과보다 영적 열매가 더 우선시되어야 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BAM Global의 「State of the BAM Movement Report (2020/21)」에 따르면, BAM 운동에 참여 중인 470명의 협력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 대다수 기업들의 재정 상태가 전반적으로 양호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선교적 비즈니스가 반드시 재정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며, ‘경제적 자립’이 항상 선교적 성취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반대로, 어떤 비즈니스가 재정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복음 전파나 제자훈련 등 그 어떠한 영적 열매도 없다면, 이는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선교적으로는 실패한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는 자신이 선교사인지, 아니면 비즈니스맨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선교사가 하는 비즈니스와 기업인이 하는 선교적 비즈니스는 그 본질과 목적이 다르며, 따라서 성공의 기준 역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비즈니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사례, 그리고 명확한 준칙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즈니스 선교는 BFM이 아닌 BAM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BAM Global에 게재된 많은 리포트들은 기업인들이 고민하는 느낌이 저는 강했습니다. 대부분의 비즈니스 선교는 기업인의 눈으로 선교를 바라보는 것 같은 인상이 컸습니다.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비즈니스는 기업인의 눈으로 바라본 선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앞으로 반드시 연구되고 정립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그 일에 우리 글로벌 브릿지 연구소와 김권세 선생님께서 힘을 써주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교사와 비즈니스 그리고 재정

 

위에서 언급했듯이, 비즈니스를 선교의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는 구체적인 모델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노동과 자비량 사역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고린도전서 9장에 나타나 있으며, 이 구절은 오늘날의 비즈니스 선교 담론 속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의 비즈니스 선교가 선교사가 아닌 ‘기업인’이 주체가 되는 BAM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의 사역과 재정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3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4절) …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6절)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젖을 먹지 않겠느냐(7절)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1절)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12절)”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며 생활비를 받는 것은 정당한 ‘권리’ 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그로 인해 생활의 보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선교사는 사역을 통해 현지 성도들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것이 영적 원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선교지의 특성상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신령한 것을 받은 자들이 육적인 것으로 함께 나누는 것” 은 바울이 제시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자신과 바나바가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그 이유는 17절과 18절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자의로 아니하여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8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자의’ 즉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순종’ 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받을 ‘상’은 자발적 보수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얻는 하늘의 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 받을 상은 없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은 명령을 행했기 때문이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의’로 한다면 상이 있지만 ‘시켜서 한 일’에 대한 상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누가복음 17장 에서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고 하시며, 부르심을 받은 종에게는 보수가 없다고 말하십니다.

이 구절은 얼핏 보면 “하늘의 상”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보상 신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을 상이 없으니, 상을 받기 위해서 모두 비즈니스를 하고 자비량으로 사역해야 할까? 물론 저도 사도바울이 모두 자신의 상을 받기 위해 자비량으로 사역해라! 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고 하늘의 상을 좇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해석은 다양하고, 개인이 어떻게 말씀을 받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고린도전서 9장의 말씀은 부르심을 받은 종들로서 사역하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이 한번 쯤 깊게 생각보고 묵상해 봐야할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로벌 브릿지 연구소의 소식을 뉴스레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Global Bridge Research Institute 모든 권리 보유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