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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복 이후 북아프리카 교회 소멸의 원인에 대한 고찰

  • 작성자 사진: mmihpedit
    mmihpedit
  • 1일 전
  • 8분 분량

정해원(아프리카 연구회 연구팀장)



1. 북아프리카 지역 소개


Figure 1. Map of North Africa Note.  Map of North Africa   | Download Scientific Di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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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는 역사가 비교적 비슷하고, 정치적·경제적 동맹을 맺고 있는 다섯 나라, 즉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리비아, 모리타니를 의미합니다. 이 다섯나라는 단일 시장 창설을 목표로 하는 아랍 마그렙 연합(UMA)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이 지역의 토착민족은 흑인일거라고 오해하고는 합니다 합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토착민족은 흑인이 아니라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인으로, 현재 북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2. 이 주제를 고찰하게 된 동기

 

저는 이곳에 파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랍인들은 모두 무슬림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아랍 국가들 가운데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에는 지금도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있으며, 이들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대대로 아랍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 온 공동체입니다.

이곳에 온지 수년 후에 이집트의 그리스도인 단기선교팀이 와서 함께 예배한 적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아랍어를 쓰는 아랍인인 동시에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들을 그저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부흥 이후 아랍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과, 기독교의 영적 유산을 상실하고 아랍 무슬림이 된 사람들을 동시에 보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3. 북아프리카 교회의 부흥 –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마그렙 지역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이집트의 군인이나 상인들에 의해서입니다(Barness, 1985). 초기 박해의 시기를 지나,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 이후, 현재의 튀니지인 카르타고 지역만 보더라도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약 70~80%에 이를 정도로 이 지역의 기독교는 크게 부흥했습니다(Frend, 1952).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곳은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가 발달했고, 이후 교역망 확대와 지방 선교사역으로 농촌까지 교회가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마그렙은 터툴리안, 키프리안, 어거스틴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활동지였습니다. 또한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통해 신약 성경 27권이 정경으로 공표된 곳이기도 합니다.

 

4. 북아프리카 교회 안의 문제들

 

이런 북아프리카에서 그루터기 교회조차 사라진 원인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으며, 이 부분은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여러 역사적·정치적 요인들이 원인으로 지적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원인은 4세기 초에 시작된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북아프리카 전역에 대박해(303~305년)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불태우고, 교회를 파괴하고 성직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북아프리카 총독에게 전달되어 즉시 시행되었습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았고, 로마의 제3의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황제의 모범 처벌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로마 전역에서 일어났지만, 현재의 튀니지와 알제리에서 가장 격렬했으며, 이 기간 동안에 3,000~4,000명이 순교했습니다(Frend, 1952).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지역 박해였습니다(Brown, 2000).

박해 이후 311년, 박해 당시 배교했던 주교 펠릭스가 서품한 카에킬리아누스가 카르타고 주교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이를 반대한 사람들은 결국 다른 주교를 세우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이들이 세운 주교가 살해되자 그를 대신해서 주교가 된 사람이 도나투스였습니다. 배교자들에 대해서 관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신앙의 순수성을 고수한 도나투스파 사이에 오랜 갈등이 이어졌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과정에서 학살과 폭동이 발생하며 갈등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갈등 상태로 양쪽 교회가 상당기간 공존하다가 411년, 당시 히포의 주교였던 어거스틴이 주재한 종교회의에서 도나투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문, 재산 몰수, 추방 초치를 받았습니다(Brepolis, 1974). 도나투스파는 카톨릭 교회와 로마 정부의 핍박을 받았고, 피지배민족으로서 반로마·반제국 정서를 가지고 있던 베르베르인들 사이에서 교세를 확장해 갔습니다.

이렇게 분열을 겪으면서 마그렙 교회들은 약화되어 있었고, 이슬람이 침입했을 때 외부 세력에 공동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상실했습니다. 이 시기 이후 마그렙의 기독교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이슬람 지배 이후 최소 400년 이상 기독교는 이슬람과 공존했습니다(Fentress,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침입 이후 교회가 급격히 쇠퇴하고 결국 소멸했으므로, 이슬람 침입 이후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5. 이슬람 침입 이후

 

이슬람은 지배민족으로서 피지배민족들에게 지즈아라는 인두세를 부과했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자에게는 인두세가 면제되었습니다. 이슬람은 초기에 피지배민족을 2등 시민으로 보호하고 어느 정도 자유를 주는 식민 통치 방식인 일명 딤미 제도를 시행했지만, 나중에는 극심한 차별과 과세로 인해 이슬람으로의 개종자가 늘어났습니다. 베르베르족은 처음에 군사적으로 저항했다가 패배 이후 지도층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빠르게 이슬람화 되었는데, 여기에도 세금 면제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대부분 카톨릭이었던 도시의 엘리트 지배층 역시 세금 부담을 덜기 위해 대거 개종을 하거나 차별과 핍박을 피해서 마그렙을 떠나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지로 이주했습니다. 

또한, 12세기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시행한 알모하드(Almohad) 왕조는 기독교도·유대인에게 개종이나 추방, 또는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기독교 마을을 잔멸하고, 아동들이 기독교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납치하거나 이슬람 교육에 강제로 편입시켰습니다(García-Arenal, 2021). 이슬람 유입 후에 기독교의 주교좌(교구)는 500개에서 40개로 이미 많이 감소했음에도(Talbi, 1990), 알모하드 왕조는 기독교를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피지배민족에 대한 보호 제도인 딤미 제도를 파기합니다. 딤미 제도의 시행과 기독교 공동체 존속은 9세기까지 여타 이슬람이 정복한 지역과 다르지 않게 마그렙 지역에서 진행이 되었으나, 알모하드 왕조 박해 시기에 이르러 마그렙 지역 교회 공동체는 경제적 빈곤, 전염병, 유목민의 침입 등 여러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면서 멸종의 주요 기점 맞닥뜨리게 됩니다(Bat Ye’or, 1996).

여타 기독교 지역과 다른 혹독한 역사적 사건이 기독교의 소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확인한다 하더라도 마그렙 교회가 완전히 소멸된 것에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랍의 다른 지역들에도 딤미 제도와 더불어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의 박해는 기독교를 더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었는데, 이슬람 시기의 박해는 기독교 공동체의 소멸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 확장될 때 이 땅에 뿌리내린 토양이 다른 지역과 달랐다는 점을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북아프리카 기독교 사멸의 원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현재 기독교 인구가 약 10%에 달하는 이집트 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비교해서 분석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6. 이집트 교회와의 비교 분석

 

첫번째, 인구 구성과 토착화 정도의 차이를 들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7세기 당시 인구 800~900만 명 중 90% 이상이 콥트어를 쓰는 토착 콥트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완전히 토착화된 민족 종교 수준이었기 때문에 아랍어 공용어화와 이슬람화가 진행되어도 교회는 민족 정체성의 핵심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행정 언어를 당시의 콥틱어에서 아랍어로 바꾸는데 기독교인 관료들의 기여가 컸고(Foss, 2009), 이 때 기독교 용어를 아랍어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PERF, 558).

마그렙의 경우, 당시 기독교는 로마 식민 도시에서 엘리트와 로마계 주민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베르베르족 민중까지는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라틴어로만 성례가 치러지고, 성경도 토착어인 베르베르어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랍-베르베르 동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비교적 쉽게 소멸됐습니다(Courtoirs, 1955).

두번째, 지리적·정치적 요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이라는 천혜의 농업 지대에 위치하여 인구 밀도가 높고 중앙집권적 통치가 가능했습니다. 지배자들은 수도 한 곳만 장악하면 전국의 세금 행정을 장악하기에 용이하였기에, 세금만 잘 낸다면 기독교인들에게 그다지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 역시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촌락과 마을 단위까지 빽빽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생존이 쉬웠던 면이 있습니다(Davis, 2004).

마그렙의 경우, 해안 도시들의 무역 중심으로 발달되었기에 대주교가 있었지만 내륙까지 손이 닿지 않았고, 도시 중심의 교회 조직이 무너지면 내륙까지 함께 붕괴되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Coombs, 2012; Anzaku, 2024). 이슬람 침입 이후 도시는 이슬람 상인층에 의해 빠르게 장악되었고, 내륙은 이후 유목 베르베르화가 진행되어 기독교 공동체가 고립·소멸되었습니다.

세번째, 이집트는 역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결정적으로 기독교의 생존이 가능했습니다. 451년 칼케돈 회의를 통해서 비잔틴과는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642년 아랍 장군 암르와의 협상을 통해서 초기 생존을 보장받았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맘루크 박해 시대에 큰 박해가 있었어도, 수도원 운동과 토착화된 기독교 민족 정체성으로 버텨낸 것이 지금까지 기독교 존속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마그렙은 알모하드 왕조 박해 당시 마을 단위의 기독교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수도원 운동이 있었으나 도시 중심이었기에 아랍군이 정복했을 때 수도원들이 빠르게 파괴되었습니다(Duval, 1982).

두 지역을 비교했을 때 기독교 생존의 핵심은 교회의 토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기독교는 토착 민족 종교로 뿌리내렸고, 강한 교회 조직 덕분에 살아 남았지만, 마그렙 기독교는 로마 식민지형 도시 기독교라 장기 전쟁과 급속한 아랍-베르베르 동화 과정에서 뿌리가 뽑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튀니지 기독교도는 0.1% 미만으로 그나마도 대부분이 외국인이고, 이집트는 8~12% 정도로 약 1,000만 명의 신자가 남아 있습니다(World Christian Database, 2024).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북아프리카 교회의 소멸에 영향을 준 주요 원인은 500년간 지속된 식민정책에 의한 사회·경제적 압박, 장기화된 신학논쟁에 의한 교회 조직의 붕괴, 유목민 이주 정책에 따른 베르베르족의 이슬람화, 12세기 알모하드 왕조의 극심한 핍박 등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서서히, 또는 급속히 소멸했고, 13세기 이후 북아프리카에는 실질적인 토착 기독교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Fowden, 1977).

이처럼 이슬람 유입 이후 북아프리카 교회가 소멸한 이유를 단순히 역사적·사회적 현상으로만 분석한다면, 반복되는 역사 가운데 지금도 유사한 사회적·영적 현상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어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받은 땅에서 공동체와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마그렙 교회는 박해를 견뎌내고, 순수 신앙을 강조하는 운동을 펼쳤고, 교부들도 순교에 이르기까지 삶과 일치한 건강한 신학을 실천했습니다. 오래 지속된 신학 논쟁으로 인한 분열, 이슬람 정복 시기에 경제적 압박(인두세)에 굴복한 점, 베르베르족의 아랍화 등은 교회를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마그렙 교회가 완전히 소멸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과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 민족의 사회·문화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느냐 아니냐가 그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열쇠가 됩니다. 따라서 복음이 사회 속 깊이 스며들도록 돕는 건강한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7. 기독교의 토착화

 

           토착화는 복음이 들어왔을 때 ‘이것이 우리 삶의 방식이다’라고 느낄 만큼 자연스럽게 민족 안에서 스스로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도록 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한 종교가 그 국가나 민족에 토착화까지 걸리는 시간은 지역별로 차이가 크지만, 현지인 주도의 교회 설립, 즉 1차 토착화는 평균 80년~15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완전한 문화적 토착화는 평균 200~300년 정도 걸립니다(Wall, 1996, 2002). 베르베르인이 강력하게 기독교 정체성을 가졌던 기간이 200년 정도이니, 베르베르족에게 기독교가 토착화되는데 시간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토착화되지 못한 이유로 당시 북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주류 사회에서 사용하던 라틴어만으로 예배를 드린 점, 성경도 베르베르어로 번역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도나투스 운동을 통해서 베르베르족에 복음을 전파하는 등의 지역적 토착화의 노력도 있었지만 이는 도시 주류세력과의 분열 안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마그렙 교회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교회들은 선교지 현장에서 교회의 토착화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복음을 받는 민족에게 익숙하면서도 복음의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문화와 사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아 교회에서 실행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 안에 좋은 자양분을 발견해서 복음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사역자의 태도 또한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에서 배운 익숙한 기독교를 가르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현장에서 현지인들을 여러 프로그램과 캠프에 참여시키면서도, 그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소화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고, 관계 중심적인 문화에서는 서로 교제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신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이 보기 좋게 진행되고 성과가 눈에 띄는 방식만 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한국교회의 문화보다 먼저 섬기는 민족의 특징, 기질, 문화를 잘 이해하고, 신앙이 그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개인을 섬겨 세울 때도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활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민족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 맡을 역할을 찾아 큰 그림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그에 따른 문화적 정체성을 말씀 안에서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 과정이 섬기는 민족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8. 글을 마치며

 

현재 교회가 뿌리 뽑힌 이곳에서 새롭게 심어지는 역사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패의 역사도 반복되지만, 성령과 교회의 기도에 의해 역사는 더 역동적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소개한 이집트 교회가 이곳에서 기독교를 전파했던 것처럼, 마그렙 교회 소멸 이후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역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그룹과 개인 사역자들이 와서 선교하고, 전도하며, 양육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 땅이 처음 복음을 받았던 때와 동일한 일이 시작되었으며, 이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새롭게 복음을 받은 자들이 이 일을 위해서 준비되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소망을 가집니다.

 

 


참고문헌

 

Anzaku, D. U. (2024). The demise of the early church in North Africa: Teaching lessons for the contemporary Nigerian church. African Journal of Religion and Theological Studies.

Barnes, T. D. (1985). Tertullian: A historical and literary study. Oxford: Clarendon Press.

Bat Ye’or. (1996). The decline of Eastern Christianity under Islam: From jihad to dhimmitude. Madison: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Brepols, Ed. (1974). Saint Augustine and the Donatist controversy. Brepols Publishers.

Brown, P. (2000). Augustine of Hippo: A biography (New editi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Coombs, P. (2012). Urban Christianity in the Maghrib. Publisher info.

Courtois, C. (1955). Les Vandales et l’Afrique. Paris: Arts et métiers graphiques.

Davis, S. J. (2004). The early Coptic papacy: The Egyptian church and its leadership in late antiquity. Cairo: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Duval, Y. (1982). Loca sanctorum Africae: Le culte des martyrs en Afrique du IVe au VIIe siècle. Rome: École française de Rome.

Fentress, E. (2018). Authority beyond tribe and state in the “Middle Maghrib.” Taylor & Francis.

Foss, C. (2009). Egypt under Muʿāwiya Part I: Flavius Papas and Upper Egypt.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72(1), 1–24.

Fowden, G. (1977). Studies on Hellenism, Christianity and the Umayyads. Publisher info.

Frend, W. H. C. (1952). The Donatist church: A movement of protest in Roman North Africa. Oxford: Clarendon Press.

García-Arenal, M. (2021). Forced conversion in the Almohad period. In Forced conversion in Christianity, Judaism and Islam. Brill.

PERF. (n.d.). Bilingual papyrus document from 643 CE (22 AH). Austrian National Library.

Talbi, M. (1990). Le christianisme maghrébin: De la conquête musulmane à sa disparition. In Conversion et continuité en Afrique du Nord.

Wall, A. F. (1996).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Maryknoll: Orbis Books.

Wall, A. F. (2002). The cross-cultural process in Christian history. Maryknoll: Orbis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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