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이란의 오래된 꿈의 충돌, 하지만 진정한 비전으로 회복을 소망한다.
- mmihpedit
- 2월 3일
- 7분 분량
Joseph Kwon(편집위원)
중근동은 고대부터 중요한 사상과 문명, 종교가 시작된 곳이다. 그리고 중동에서 일어나는 대부분 분쟁의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이 분쟁이 자원의 분배, 국경선 문제, 국익의 충돌 등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각과 사상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과 사상의 대립은 수천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해결이 어렵다. 생각과 사상이 대립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로 다른 생각과 사상을 통일하거나 다른 생각과 사상을 박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동지역의 생각과 사상은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서로 충돌하는 생각과 사상을 통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타협점이나 합의점을 찾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래서 늘 중동지역은 세계의 화약고와 같으며, 특히 이 모든 생각과 사상,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은 당장 내일 제3차 인티파다가 터지거나, 중동전체가 휘말리는 거대한 전쟁이 터져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극단적인 불확실성이 늘 존재하는 곳이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이스라엘과 이슬람 원리주의 간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과의 대립 모두는 사실상 두 진영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분쟁이다. 하마스, 이슬람 원리주의, 이란, 이스라엘 등 분쟁의 당사자들이 현실의 문제 즉 각 집단의 번영과 안정에 집중한다면 해결책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해당 공동체의 번영과 안정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생각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과 이념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념집단주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과 테헤란은 서로 1500km이상 떨어져 있으며, 서로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지 않다.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이란이 1500km이상 떨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하는 것 혹은 나아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이란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란은 1979년이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감행했다. 또한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이지만 순니파 이슬람 원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무슬림 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하마스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대리전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란 - 이슬람 혁명주의와 종말론적 소망
먼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의 이란을 생각해보자. 고귀함, 존귀함을 뜻하는 이란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란 민족은 아랍민족과 다르게 페르시아 문명을 기반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민족이다. 그리고 페르시아 문명의 기반은 조로아스터교인데,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대결이 분명한 이원론적 종교였다. 이 종교는 선과 악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결국 선과 빛이 어둠과 악을 이기는 마지막 종말을 믿는다. 그리고 인간이 선과 악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악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요구한다.
15세기 이란 사파비 왕조가 아랍의 순니파와는 다른 시아파를 선택하며 이란의 정체성은 페르시아 문명의 특징과 시아파라는 이슬람 종교가 결합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순수한 혈통을 중시하며, 이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순니파에 의해 핍박을 받는 소수 종파였다. 또한 시아파는 메시아적 등장에 대한 종말관을 가지고 있다. 무함마드 사후 무함마드의 혈통을 따라 종교 지도자의 대(代)가 이어졌고, 이것을 반대하는 수니파에 의해 무함마드의 후손들이 핍박을 받다가 12번째 이맘(종교 지도자)이 사라졌는데, 시아파는 이 12번째 이맘인 마흐디가 세상의 마지막에 돌아와 세상을 회복할 것이라는 메시아적 소망을 바탕으로 한 종말론을 믿는다. 그렇기에 이란 민족은 지금 당장 박해와 억압을 당할지라도 옳은 것을 고수하며 선을 따른다면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다는 종말론적 희망과 악에 대해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숭고하고 순수한 정신을 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정체성은 문명과 종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이념집단주의 성격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정신의 핵심은 ‘이슬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였다. 원래 원형 이슬람, 즉 무함마드가 실현한 이슬람 체제는 정치와 종교가 연결된 국가 체제였다. 그리고 이슬람 가르침의 기준인 샤리아(이슬람 표준 혹은 법)에서 말하는 법과 원칙에 따라 국가와 사회전체가 움직여야 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는 이 이념을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독특한 정치 구조를 가진다.
나아가 이란 혁명사상은 무함마드가 실현한 원형 이슬람을 이란 공동체에만 적용하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하고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이란은 공격적 이념집단주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이상은 전 세계 사람들의 독립, 정의, 진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무스타다훈(억압자)과 무탁빌룬(억압자)의 정의로운 투쟁을 지지한다.”라는 이란 헌법 154조에 잘 드러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란은 자신의 이슬람 혁명이 전 세계로 확장되기를 원하고 그 실천의 일환으로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비롯하여 이라크, 시리아, 바레인 등의 시아파 무슬림 단체들, 나아가 팔레스타인 하마스를 포함한 다양한 테러단체와 예멘 후티 반군 등에 지원을 하고 있다.
즉 이란은 메시아 컴플렉스의 일환으로 메시아의 도래, 즉 완전한 이상을 추구하며 그 꿈을 위해 현실의 이익과 계산을 뛰어 넘는 결정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 안식일과 메시아 소망
국제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일반적으로 이성적 결정을 하는 합리적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대부분 합리적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다른 국가와는 달리 독특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존이다. 대부분 국가들은 대외관계에서 생존의 가치보다는 국익을 중심으로 국제관계를 풀어간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특이하게 생존을 다른 어떤 가치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수천년 지속된 반유대주의와 디아스포라의 시간을 거치며 민족전체가 멸절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공통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가치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 혹은 잠재적인 적에 대해서는 그것이 누구든지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생존은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번째는 생물학적 생존이고, 두번째는 정신의 생존이다. 정신의 생존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정체성과 가치, 즉 유대교를 바탕으로 구성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유대인의 경우 수천년 동안 왕과 같은 리더십, 국가와 같은 지리적 구심점이 없이 파편화되어 전세계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 긴 시간 동안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 유대교라는 공통된 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교의 다양한 율법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 유대교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통 기독교인은 안식일을 종교적인 모임을 하는 특정한 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이러한 종교적 모임을 하는 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안식을 해야 하는 날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동물과 식물, 땅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안식은 도래할 메시아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완전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안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 역사의 마지막에 임할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 유대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잃어버릴 막연한 희망이 아닌, 불가능할 것 같지만 분명히 이루어질 희망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안식일을 경험하면서 비록 지금은 위협과 불안 속에서 유리하는 삶을 살지라도 우리 선조의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수천년의 디아스포라 시간 동안에도 유대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렇듯 안식일을 통해 지켜온 희망을 바탕으로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 전세계 유대인들은 시온,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현실과 꿈
사실 모든 인간과 인간들이 만든 공동체는 현실을 살지만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실과 꿈이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현실의 문제는 타협과 협상, 힘의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특정 공동체의 특성과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꿈, 즉 소망과 비전이다. 그래서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시장의 논리는 전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사상과 꿈, 이념이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당사자들이 어떤 원수보다 격렬하게 분리된다.
지난 근대 역사를 보아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을 알린 얄타 회담 이후, 세계는 철저하게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나뉘어 오랫동안 냉전체제를 유지했다. 그리고 냉전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몰타 회담 이후 많은 학자들은 이제 이러한 이상과 이념의 영향력은 사라지고 세계는 개인의 본성과 욕망을 따라 현실적 이익과 번영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몰타 회담 이후 거대 담론인 이데올로기는 사라졌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소규모 담론과 문명권별 담론이 충돌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로써 결국 인간은 현실 위에 있는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면 수많은 공동체의 꿈과 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에 존재했던 그 많은 꿈과 이상들 대부분은 공동체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흡수되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공동체들을 살펴보면 특이하게 메시아적 비전을 가진 공동체들만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앞서 상술했던 페르시아 문명을 계승한 이란과 유대교를 기반으로 한 이스라엘이 그렇다. 사실상 이슬람 원리주의 또한 유사한 종말론적 메시아적 비전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예루살렘을 둘러싼 강력한 사상들이 너무나 서로 배치되고 있고, 이 사상들을 품은 비전 공동체들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미래와 예루살렘의 미래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다는 것이다.
좀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답을 찾아보자.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현실과 꿈의 추구가 반복된다면 인간은 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이상과 꿈을 추구하는가. 이 문제는 결국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결국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이 나뉘고 다양한 꿈과 사상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며 충돌하게 된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철학자들은 지금도 사색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 안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수많은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 이들을 통해 그 답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 답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찾아보자. 다른 말로 예루살렘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은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돌아보자. 극단적인 증오와 대립이 지속되는 예루살렘 문제에 대한 답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범한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은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돌아볼 수 있는 출발점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경험할 수 있다. 가인은 여기서 실패를 했고 결국 형제 살인의 범죄에 다다르게 되었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예배가 무너지면서 결국 예루살렘이 모든 분쟁과 갈등의 근원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가인 이후 무너진 인류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셋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리고 창세기 4장 26절은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예배의 실패를 경험하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이 회복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작은 의외로 참 간단하다.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에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주의 이름은 매우 중요한 구절들에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의 운명을 이야기하시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아주 특이하게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부르지 않는 이름이 두 개 있는데,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의 이름이다. 십계명 중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부르지 말라는 세 번째 명령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주님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으로 읽는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짜 이름이 야훼인지 여호와인지 모르게 되었다.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이름, 즉 예슈아의 이름이다. 유대인들이 예슈아의 이름을 저주의 이름으로 바꾸어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의 이름으로 대신하고 있다.
나는 지혜도 배우지 못하였고 거룩한 것들에 대한 지식도 없느니라.
하늘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신 분이 누구신가?
바람을 자기의 주먹 안에다 모으시는 분이 누구신가?
옷으로 물들을 싸매신 분이 누구신가? 땅의 모든 끝들을 정해 놓으신 분이 누구신가?
그 분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
(잠30:3-4)
어쩌면 잠언의 기자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루살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할 때 성경 말씀처럼 이 민족에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진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인된 우리와 다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관계의 회복은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시작됨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 이 땅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예슈아의 이름이 높여지고 그분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때 이 민족의 진정한 정체성이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 안에서 회복된 정체성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볼 때 결국 이 민족이 이 주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예루살렘을 사랑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품은 모든 파수꾼들이여,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으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